포르투갈령 마카오
1. 개요
포르투갈령 마카오(Macao Portuguesa)는 1557년부터 대항해시대당시 포르투갈 왕국이 이 지방에 진출하여 영유권을 행사한다.
영국이 홍콩을 점유한 것과 다르게 포르투갈이 이 지역을 무력으로 식민지로 삼았던 것은 아니고[3] 되려 포르투갈이 명나라의 환심을 사서 영유권을 얻었다.
그 뒤를 이은 만주족 청나라도 수 십년이나 있던 영유지를 굳이 꼬투리 잡아서 없애기도 그렇고 서양과의 교섭 창구, 무역거래, 무기 수입 등[4] 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카오를 내버려두었다.
이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홍콩을 뜯어내는 것을 보고 자극 받은 포르투갈이 이 지역에 대한 식민지배의 권한을 요구하고, 영국에 처참히 패배한 청나라가 별다른 분쟁 하나 없이 결국 이 땅을 포기한다. 당시 포르투갈도 아편전쟁에 참여할 제스처를 보이자 당황한 청 황제는 당초 조차지가 아닌 근해의 타이파 섬과 콜로안 섬까지 떼어줘 버렸다. 이후 이땅은 포르투갈의 정식 해외주로 편입된다.
1849년부터 1999년까지 대략 150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5]
이후 1975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해외 식민지 포기선언을 한 포르투갈이 중국의 새 주인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 제의를 해 덩샤오핑이 홍콩과 함께 1국가 2체제를 적용해 돌려받기로 합의, 1999년 포르투갈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마카오를 반환하면서 식민지 시대는 끝나게 된다.
2. 역사
2.1. 포르투갈의 중국 진출
16세기 초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대륙과 무역 활동을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당시 중국 대륙을 영유하고 있었던 명나라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명나라와의 협상은 순탄치 않았다.
명나라는 포르투갈을 야만적인 해적집단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로부터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고립주의 정책을 견고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1529년 광둥 지방의 순무(巡撫)인 임부(林富)가 명 정부에 광동, 광서 지역의 재정 확보와 외국과의 교역 증가를 요구했지만 묵살되었다. 그동안 포르투갈은 1543년경 일본(당시 무로막치 막부 시대)과 이어진 해로를 탐색하여 일본 남부의 큐슈와 교역을 개시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중국제 비단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의 큐슈까지 중국제 비단을 운송하기 위해 중국 해안에 위치한 확고한 근거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동서양을 잇는 무역기지로써 중외무역이 발달하였고, 예수회의 기독교 선교에도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고아로부터 말라카를 경유하여 중국해안 근처의 합의된 장소에서 중국제 비단을 실어갔다. 그리고 그 비단을 일본에 매매했고 일본으로부터 주로 은을 받았는데, 중국인들은 이 은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은을 처분하고 상선들은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싣고 다시 말라카를 거쳐 고아로 되돌아가 유럽에 수송하는 중개무역을 하였다. 이러한 무역은 포르투갈에게 큰 이익을 남기며 1640년까지 계속되었다.
2.2. 포르투갈의 마카오 식민경영
포르투갈 상인들은 해적질이 아닌 클린한 무역 활동으로 명나라 정부로부터 신뢰를 얻었고 또 당시 명나라의 황제 가정제는 불로장생에 집착해 채향사(採香使)들을 시켜 방방곡곡에서 용연향을 구하게 했는데, 전세계에 연락선이 있는 포르투갈 상인들은 용연향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 황제의 환심을 샀다.
1555년 광둥성에 속해있던 마카오 섬에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마카오는 원래는 섬이었는데 주강의 퇴사 토적으로 해안선이 매워져 현대에는 반도가 되었다.[6]
포르투갈인들이 진출하기 이전 마카오는 단지 조그마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마카오 해변가 모서리에는 어민들이 바다의 여신 마조(媽祖)를 위해 건립한 천후성모고묘(天后聖母古廟)가 있어서 마각묘(媽閣廟)[7] 라고도 불렸다.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온 이후 이 마각묘의 '마각(媽閣)' 두 자가 광둥어 발음(ma5 gok3) 때문에 현재의 마카오(Macau)로 알려졌다.
1557년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 확정된 거주지를 설립하고, 중국의 내륙지방과 정규적인 상업교류를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광둥에서 비단구입을 허락받는 등 중국 본토와 관계를 더욱 확대했다.
마카오 식민경영 초기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가 속해있는 광둥 성 당국에 소정의 공과금(公課金)을 납부하고 중국 상급 관리청의 통제를 받았다. 대략 매년 은 5백 민(緡)을 납부하였다고 한다. 광동인들은 포르투갈의 마카오 식민지배가 장차 야기하게 될 문제점[8] 을 염려했지만, 중국 조정이 마카오의 상황에 대해 얼마나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여간 중국은 마카오까지는 인정해줬지만, 마카오 이후로는 수백년 간 서양인들에게 이런 창구를 추가로 더 내주려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마카오에 욕심을 냈지만 포르투갈인들의 결사항전으로 패배하고, 대신 대만 섬을 거점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정성공에 의해 쫓겨난다.
광동인들도 마카오가 포르투갈의 무역기지 역할을 하면서 이익을 보았으므로, 광둥성은 포르투갈로부터 소정의 공과금을 받았고 비단을 더 많이 수출할 수 있었다. 또한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통해 중국의 외국무역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고 해당지역의 해적 통제에도 도움을 주었던 듯하다.
이후 마카오에서는 비단과 은이 교역되면서 부유층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마카오는 향신료, 목화, 도자기, 구리, 화약, 금 등도 수출입되었지만, 비단과 은에 비하면 비중이 크게 뒤떨어져갔다.
마카오의 경제가 활성화되자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포르투갈인들만으로는 수가 부족하여 광동 출신의 중국인들[9] 이 채용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마카오 밖에 주거지를 두고 일하였으나, 16세기 후반에 가면 마카오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급증했고 일부는 부유층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당시 무역활동뿐만 아니라 가톨릭과 협력하여 선교활동도 했다. 마카오에 거주하게 된 중국인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서방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또한 성당 몇 곳이 건립되었고 포르투갈인들과 통혼하는 사람도 늘어나 혼혈인도 증가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1576년에는 동아시아 최초로 주교가 나왔다. 1594년 12월 1일에는 예수회의 건의로 성 바오로 학원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와 목상이 안치된 마카오의 성 안토니오 성당도 이 시기(1558년- 1560년) 지어졌다.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고 대만의 정씨 왕국을 말려죽이기 위해 강력한 해금령을 내리자 마카오도 타격을 입을 뻔했지만 강희제의 신임을 받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덕분에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마카오의 위상은 갈수록 약해졌다. 마카오는 수심이 얕아 대항해시대 초반의 범선은 드나들 수 있었지만 근대 이후의 거대한 배들이 정박하기는 힘들었다. 포르투갈이 근대로 가면서 삼류 열강으로 떨어지며 본국과의 상업도 심각하게 쇠퇴했다. 물론 결정타는 옆에 영국령 홍콩이 세워진 것이었지만 그 전에도 마카오는 이미 한참 내리막을 타고 있었다. 애초에 근세 마카오가 번영했던 지정학적 배경 자체가 나가사키-마카오-말라카-고아-호르무즈-동남부 아프리카 해안요새-기니 해안-포르투갈 본토를 연결하던 포르투갈 제국의 거대한 인도양-동태평양 무역망 전체에서 연결점으로 성장했던건데, 17세기 들어가면서 일본, 말라카, 호르무즈, 몸바사 등 중요 거점이 하나하나씩 신흥 네덜란드에게 함락당하거나 토착 세력에게 축출당했는데 마카오 혼자서 뭐 어찌 번영을 유지할 여간이 없었다.
1842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박살내자 서양 열강들이 청나라를 점점 호구로 보기 시작하고 청나라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수많은 이권을 뜯어냈다. 포르투갈도 이에 편승해 1851년과 1864년에 원래 마카오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무인도인 타이파와 콜로안을 점거하고 1887년에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어 마카오를 정식으로 포르투갈 영토로 삼았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수 많은 피난민들이 마카오로 몰려든다. 그래서 원체 인구가 적은 이 곳의 사람들의 90%는 본토 출신으로 채워져 버린다. 이들은 19세기 이전부터 원래 마카오 반도에 살던 사람들과는 같은 한족이지만 구분이 되게 되었다. 마카오인들은 광동인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광동어에 포어를 섞어 쓰는 등 자신들이 얼마나 '''서양화'''되었는지를 과시하는 등의 행동들을 했으나 이웃 홍콩과는 달리 갈등이 크진 않았다. 어차피 마카오 자체가 인구가 너무 적어 이들 대륙인이 없으면 뭐가 안 돌아가는 곳이라 그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국에 속한 영국과 달리 포르투갈이 일단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영국령 홍콩과 광저우가 일본군에 점령되었을 때도 마카오는 무사했는데, 이때 그쪽 지역의 피난민이 몰려와 인구가 잠깐 증가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 제국은 근처의 영국 식민지 홍콩과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을 점령한 뒤에도 굳이 마카오는 공격하지 않았고[10] 그 결과 마카오는 홍콩과는 달리 일본에 딱히 나쁜 감정은 없다.
그렇지만 이 포르투갈도 만약을 대비 국경에 수병들을 배치하고 포대의 방어력도 점검하는등 전쟁 준비를 안 한 건 아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살라자르 정부 하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편이었기에 마카오를 통해 일본에 석유를 팔기도 했었고, 이 때문에 미군의 폭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일제도 중화민국을 압박하기 위해 마카오 영사관을 설치하고 중국인의 항일 활동을 감시했고, 물론 중국인들의 일제 인사에 대한 습격도 있었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이후 장파쿠이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마카오를 포위하고 마카오 무력 회수를 시도하였으나 마카오 식민당국이 마카오 내부의 반포르투갈 운동을 진압하는 한편 영국을 통해 마카오에서의 국민당 활동 합법화 등을 제시하자 해결되었다.
그리고 국공내전으로 또 한 번 대규모 난민들이 마카오에 들어온다.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포르투갈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점령을 우려했으나 서방과의 정면 대결을 바라지는 않던 중국은 이곳을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포르투갈의 영유권을 존중했다. 하지만 중국은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대해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는데, 예를 들면 1952년 관갑 사건을 통하여 마카오 외곽의 포르투갈군 군사 초소를 모조리 점령하였다. 이렇게 포르투갈의 무역기지이자 동아시아 선교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던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본국의 법 개정에 따라 1951년 식민지에서 해외주로 전환되었다. 당시 중국은 아직까지 아주 후진 나라였고, 홍콩을 보유한 영국은 5개의 눈으로 넘사벽 천조국인 '''미국'''과 동맹이어서 중국 따위는 신경도 안 썼으나 포르투갈은 이미 약체로 전락한 지 오래였으며, 식민지 전쟁을 통해 인도에게 고아를 빼앗기고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에서도 소련을 등에 업은 현지인 게릴라에게 밀려 패퇴 중이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홍위병들이 야금야금 들어와 점령을 시도했으나 포르투갈이 아무리 약체화되었어도 이딴 오합지졸 민간인들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어서 군을 동원해 방어에 성공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마카오에서도 마오주의를 가르치는 학교들이 늘어나고 중국 공산당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당시 반공주의가 강렬했던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 역시 반공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이들을 탄압하다가 1966년에 12.3 사건같은 중국계 주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폭동은 진압되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이에 반발해 폭동 주동자 석방, 폭동 진압 책임자 처벌, 진압 사과 및 배상 등을 요구하며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마카오의 친중공 성향 중국인들도 세금 납부 거부, 철시 등 대대적인 불복종 운동을 벌였다. 포르투갈 정부는 이에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다가, 인민해방군과 전쟁을 벌이면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중공과 커넥션이 있었던 중국계 마카오인들의 중재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였다. 이 일로 굴욕을 당한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는 반공 색채를 누그러뜨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던 본국의 방침도 무시하고 마카오의 친중공 중국인들을 정계에 들이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교류하며 중국 국민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등 친중공 성향을 보였다. 사실상 이 일로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더 이상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평가할 정도.출처
1974년 포르투갈 정부는 카네이션 혁명 이후 모든 원거리 식민지를 자진해서 포기하기로 했다. 당시 포르투갈령 마카오도 반환하기로 했는데, 중국이 거부했다. 당시 영국이 홍콩 전체의 반환을 거부하고 신계 외곽만 반환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협상이 길어졌고, 중국은 이 문제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를 '중국 땅이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곳'으로 해석하는 데 합의하여[11] 언젠가 반환이 이뤄져야 하는 데는 양국이 입장의 일치를 보였고, 포르투갈 정부도 이에 근거해 1976년부터 마카오를 특수 영토로 지정해 마카오 정부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이양했다. 또한 이에 앞서 1974년에는 마카오 주둔 포르투갈군을 철수시켰으며, 1999년 중국 반환으로 인해 인민해방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군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979년 포르투갈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함에 따라 마카오 반환 의견이 대두되었고, 영국이 전향적으로 홍콩 전체를 반환하고 중국이 특별 행정구역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한 1984년 중영공동선언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1987년에 또 다시 반환 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이번에는 중국이 받아들임으로써 1987년 3월 26일에 홍콩과 유사한 일국양제의 논리로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함을 규정한 중국-포르투갈 공동선언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마카오는 1999년 12월 20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마카오 반환식. 2년 전 홍콩에서도 유사한 의식을 치렀다.
현재 마카오는 중국의 일개 행정구역인 특별행정구로 사회주의가 적용되지 않고, 외교와 국방을 빼면 사실상 독립국처럼 흘러간다. 과거 유고슬라비아나 구소련을 구성하던 각 공화국들과 비슷하게 준 독립국 취급하는 직할 행정구역이라고 보면 된다.
2.3. 반환 이후
1999년 포르투갈은 반환 이전 합법적으로 마카오에 거주하던 주민 전원에게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함으로써[12] 중국이 일국양제를 지키지 않을 경우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홍콩 보안법 비슷한 마카오 보안법을 실행하고 있음에도 일국양제를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13]
3. 참고 문헌
- Roderich Ptak, 申龍澈 (1985). 포르투갈 極東貿易의 成衰. 동양사학연구, 22, 135-158.
- 이경규 (2013). 동양근대사 수업활용을 위한 중국의 세계 문화유산 조사 연구. 동아인문학, 25, 185-210.
4. 관련 문서
[1] 이 깃발과 휘장은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의 상징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포르투갈령 마카오 그 자체를 상징하는 깃발과 휘장은 따로 없었고 포르투갈 국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1988 서울 패럴림픽에 참가할 때는 포르투갈 국기를 사용했고,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과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는 링크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서구권 강국이였던 대영제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은 옆동네 홍콩은 '영국령 홍콩' 자체를 상징해주는 깃발이 존재했었으나,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무려 100년 이상이라는 긴 시간 중에 정작 공식적인 행사에서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고 1997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할 끝자락에 겨우 사용된 케이스라 많이 뭍혔다.[2] 특히 마카오인들은 마조(媽祖), 광둥어 발음으로 마조우(Māa Jóu)라는 바다의 여신을 주로 숭배했는데 이것이 마카오의 어원이 된다.[3] 사실 호르헤 알바레스가 이끄는 탐험대가 지금의 홍콩 신계지역인 튄문, 당시 광동성 신안현 둔문진에서 행패를 부리다 광저우 총독이 보낸 수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조총과 불랑기포 등을 압수당한 바 있다. 이후 협상을 통해 알바레스는 마카오로 갔다.[4] 청은 포르투갈 대포인 홍이포와 조총 때문에 영원성 전투에서 명과 몽골 연합군에 대패했고 누르하치도 홍이포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청나라는 이후 공중덕, 홍승수 등 한족 항장들을 이용해서 홍이포와 조총을 대규모로 확보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농성중이던 조선군은 청군의 홍이포 맹포격에 전의를 상실했고, 결국 굴욕적인 항복을 한다.[5] 포르투갈이 자국 영토임을 선언한 것은 1849년이나, 청나라가 영유권을 인정한 것은 1862년이다. 다만 이 10여년 시간동안 따로 분쟁은 없었다.[6] 이 토사 퇴적은 중국 쪽의 병크 때문에 계속되어서 조만간 마카오 반도 쪽 외항은 배가 못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 있고 그래서 반환 후 조그만 암초였던 코타이를 간척해 남쪽의 타이파 섬과 합체한 후 항만시설을 옮겼다. 겸사겸사 카지노 관광단지 및 마카오 국제공항, 코타이 신도시 등도 세우게 된다.[7] 아마(A-Má) 묘, 아마 사원이라고도 한다.[8] 포르투갈 및 스페인을 시점으로 한 유럽 열강의 러시. 18세기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19세기 중후반에 아편전쟁과 청불전쟁 등으로 현실화가 되어 베이징까지 털렸다.[9] 주로 객가와 치우차우, 광동인들이다.[10] 다른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동티모르는 점령을 했지만, 동티모르에 호주군과 네덜란드군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동티모르를 점령할 때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포르투갈은 중립을 지켰다. 그 결과 일본은 동티모르를 점령하는 선에서 끝냈다.[11]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부터 포르투갈령 마카오와 영국령 홍콩에 대해 '중국 땅(주권)이지만 영국/포르투갈이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주권과 치권은 불가분이므로 반드시 반환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포르투갈은 1974년에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인정한 것이다.[12] 홍콩과는 달리 British National (Overseas) 같은 명목상의 국적이 아니라 정식 포르투갈 국적이기 때문에 지금도 마카오 인구 상당수는 포르투갈 국적을 가지고 있다. BNO 국적과 달리 정식 국적으로 인정되기에 그 자녀에게도 출생신고 또는 1999년 이전 부모의 마카오 귀화와 동시에 포르투갈 국적이 부여되기 때문. 대표적으로 김한솔의 경우인데, 부모의 포르투갈령 마카오 귀화에 따른 수반취득으로 김한솔 또한 포르투갈 국적을 얻게 된 바 있다.[13] 사실 포르투갈의 인구 구조도 심각한 상황이라 오히려 중국이 스스로 사고를 쳐 줘서(...) 중국과의 관계를 상하게 할 것 없이 합법적으로 마카오 거주민들을 데려오는 게 더 이득이기도 하다.